한국은 1960년대 포장과 패키징을 수행하는 후공정 공장을 가동하면서 반도체 생산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부가가치가 낮은 후공정에서 만족하지 않고 1980년대 중반부터 웨이퍼를 가공하는 전공정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반도체 제조 국가로 발돋움하였다. 한국 반도체는 빠르게 세계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2013년부터는 점유율이 미국에 이어 2위로 부상하게 된다. 한국 반도체산업이 이렇게 성장하는 동안 정반대로 반도체 제조업이 쇠퇴한 국가가 있다. 바로 일본이다.
일본 기업이 반도체를 생산하기 시작한 계기는 한국과는 다르다. 1980년대 한국 기업이 본격적으로 반도체를 생산하기로 한 이유는 반도체가 전기·전자산업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부품인 것을 인지하고 그 자체를 최종 판매할 상품으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반면, 1970년대 일본 전기·전자 기업들은 핵심 부품이 트랜지스터에서 반도체로 전환되는 시점에 세계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따라서 반도체가 최종 판매를 위한 제품이 아니라 자사 제품의 성능이나 기능을 높이기 위한 부품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작은 자사 제품의 부품으로 사용하기 위함이었으나, 점차 세계 시장에서 반도체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점유율이 미국을 추월하기도 하였다.
반도체를 생산하기 시작한 계기가 어찌 되었든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제패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점차 반도체 제조업이 쇠퇴하게 된다. 일본 반도체 제조업의 쇠퇴 이유는 다양한 분석이 있으므로 굳이 여기에서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 과정이 흥미롭다.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의 거품이 가라앉으면서 기업들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대부분 기업이 경영난을 헤쳐 나가기 위해 구조조정을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익이 발생하는 반도체 사업부를 매각해서 적자가 발생하는 주력 사업부의 손실을 메우는 경우도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러 기업의 반도체 사업부를 통합한 엘피다 메모리 주식회사가 탄생하였으나, 결국 2012년에 미국의 마이크론에 인수되었다. 한때 세계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의 반도체 제조업이 생각보다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한편, 한국 역시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겪으며, 반도체 기업 간의 ‘빅딜’이 성사되었다. 당시 현대전자 반도체사업과 LG반도체가 일원화되면서 현재 SK하이닉스의 모체가 되었다. SK하이닉스는 현재 세계 시장에서 10위 안에 포함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상에서 보면 한국과 일본의 반도체산업은 출발점이 다르고 그 과정에서 비슷한 사건들이 발생했지만, 그 결과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최근 세계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으로 인해 한국도 일본도 또다시 변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건설하고 있으며, 일본은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면서까지 대만의 TSMC를 유치하였고 첨단 파운드리 기업인 라피더스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변화하는 세계 반도체산업 환경 속에서 각자 다른 분야에서 다른 방법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그 목표는 변하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살아남고 발전하는 것, 그것 하나일 것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연구본부 신산업실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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