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가에 세컨슈머가 바꾼 ‘유통판’
백화점·대형마트 참전…시장 격변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 지난해 생애 첫 중고 거래를 맛본 30대 남성 직장인 신모 씨는 인터넷 거래 사이트인 네이버카페 ‘골마켓’에서 2~3일에 한 번꼴로 몽클레어·띠어리·랄프로렌·리바이스 등 검색어를 입력한다. 신 씨는 “미개봉이나 단순개봉 신상품이 70~80% 할인된 가격에 나올 때가 있다”며 “단순 포장만 뜯었을 뿐인데 온라인 최저가보다도 싼 제품을 ‘득템’하면 만족감이 크다”고 했다. 그는 “이것이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와 가심비(가격 대비 만족도)를 모두 갖춘 합리적인 새로운 쇼핑법”이라고 강조했다.
고물가 시대, 불황형 소비 트렌드가 확산하며 가성비를 내세운 소비 트렌드가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프리미엄 브랜드 신상품보다 저렴한 ‘하위 호환’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닌,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본인이 갖고 싶은 브랜드의 ‘미개봉 신상’, ‘A급 신품’ 등 N차 중고 상품을 구매하는 쇼핑 패턴이 떠오르고 있다. 이제 중고 제품이 ‘남이 쓰던’ 상품만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올해 ‘세컨드 부티크’, ‘프리미엄 재고’ 등 신조어가 등장한 배경이다.
신세계사이먼 파주 프리미엄 아울렛에 입점된 프리미엄 재고 쇼핑몰 ‘리씽크’. 이정아 기자 |
품질이 같은 상품에 대해 어떤 시장이든 하나의 가격만이 성립한다는 ‘일물일가의 법칙’도 사라졌다. 22일 기준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는 비닐 포장도 뜯지 않은 에어팟 3세대 새 제품이 18~21만원대에서 다양하게 거래되고 있다. 애플 공식홈페이지에서 25만9000원에 판매 중인 상품이다.
‘미개봉 중고’는 1차 신상품을 취급하던 유통시장까지 위협하고 있다. 백화점이나 아울렛이 중고 재고를 유통하는 플랫폼과 손을 잡거나, 대형마트가 반품이나 약간의 흠이 있는 리퍼브 재고를 경쟁적으로 확보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코로나19가 유행하던 때 온라인 중고 거래는 신상에 웃돈을 얹어 되파는 ‘리셀테크’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대형 오프라인 점포를 갖춘 유통 기업이 중고 시장을 공략하면서 ‘왝 더 독(Wag the Dog·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현상)’이 가속하는 추세다.
롯데마트에서 리퍼브 제품을 살펴보는 고객 모습. [롯데마트 제공] |
올해 8월 신세계사이먼 파주 프리미엄 아울렛이 이례적으로 프리미엄 재고 쇼핑몰인 ‘리씽크’를 입점시킨 것도 마찬가지다. 리씽크에 따르면 1~10월 판매 건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 증가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11월에는 스마트 워치와 청소년 바디프렌즈 안마의자 판매량이 전달보다 50% 이상 늘었다. 리씽크 관계자는 “주말 기준으로 하루 평균 500명이 (신세계사이먼 파주 프리미엄 아울렛 매장에) 방문하고 있다”라며 “재고나 중고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헌 것’에서 가성비 있는 ‘가치 소비’로 변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9월 백화점 업계 최초로 중고품 전문관을 문 연 현대백화점은 지난달 중고 명품 매입하는 ‘미벤트’ 팝업스토어를 열기도 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비용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다양한 상품을 경험할 수 있어 젊은층을 중심으로 중고를 선호하는 인식이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형마트도 리버프숍을 통해 참전하는 분위기다. 롯데마트는 내달 광주시 서구에 있는 월드컵점에 약 300평 규모의 리퍼브숍을 개장한다. TV·전자레인지 등의 필수 가전과 소파·식탁과 같은 가구 등을 70% 할인가에 취급할 계획이다. 서민지 롯데마트 리빙테넌트 MD(상품기획자)는 “올해 10월까지 리퍼브 상품의 누적 매출은 작년보다 10배 증가했다”며 “고물가 시기가 계속되면서 리퍼브 상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는 행사를 더 많이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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