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보다는 직업이 중요한 시대
코로나 19로 재택근무 늘며 집 근처 가까워야한다는 상식 깨져
‘직주일체→직주분리’ 형 다거점생활 트렌드
직장보다는 직업이 중시되는 시대다. 회사가 미래를 책임져주던 때는 지나갔다. 종신고용·연공서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형 인간’은 설 땅을 잃었다. 기업은 냉엄해진 시대변화를 받아들였다. 호시절에 만들어진 고용·임금구조를 빠르게 바꿨다.
이젠 ‘고용은 곧 비용’이란 인식이 자리 잡았다. 기업마다 ‘잉여 고용’을 없애려고 필사적이다. 실적이 나빠도 미래수주를 감안해 해고 없이 품고 있던 고용보장 시대는 끝났다. 전성기 때 10%의 잉여고용(사내실업)은 허용됐지만 더는 아니다. 성과 없는 고용은 없다.
서울 중구 일대 오피스 밀집지역 모습 [헤럴드경제DB] |
이젠 비정규직 전성시대다. 영리해진 MZ세대(밀레니얼+Z세대)는 ‘회사형 인간=평생고용’의 주술을 거부한다. 그보단 선배세대는 꿈도 못 꾼 공정·정의실현형 하극상(?)까지 발휘한다.
직업과 주거는 불가분의 관계다. ‘직주(職住)’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직주 근접’은 전통 모델의 핵심이다. 농경사회에서 일과 집은 분리되지 않았다. 도보생활권은 상식이자 표준이었다. 산업혁명은 이 모델을 뒤흔들었다. 물류·비용을 감안한 외부공간에 대형공장을 지어 노동을 동원·투입했다. 인류최초의 직주분리였다. 투입 대비 효과의 합리·효율성은 이후 250년 간 자본주의를 지배했다. 달도 차면 기울기 마련이듯 직주분리의 부작용은 반발·저항으로 연결됐다. ‘일’이 먼저고 ‘집’은 후순위니 집에서 펼쳐져야 할 여러 삶의 기본은 왜곡되기 시작했다.
출산파업이 대표적이다. 먹고 살기도 힘든데 자녀까지 낳고 기르라는 과제는 양립하기 어렵다. ‘일과 집의 양립조화(Work & Life Balnace)’가 떠오른 것도 직주분리의 공간·시간적 괴리축소를 위한 시도다.
한국은 직주분리의 선두사회다. 압축성장의 상징국가답게 단기간에 직주분리가 발생했다. 일은 서울에 있지만, 집은 수도권에 몰린 경우가 많다. 면적기준 12%에 불과한 수도권에 우리나리 인구 52%가 몰려 있는 이유다. 당연히 삶의 질은 떨어진다. 출퇴근에 적어도 1~2시간을 쓰면 생활수준은 악화된다.
후속 세대일수록 선택지는 없다. 반면 이들은 단군 이래 가장 똑똑한 판단력을 지녔다. 고학력과 저성장의 만남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완성한다. 가족 희생보다 자기만족, 회사미래보다 본인장래, 표준모델보다 현실 생활을 중시한다. 직주일체를 갈망하긴 하지만 직주분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가운데 본인다움을 찾고 작지만 중요한 현실 만족을 도모한다.
코로나19는 직주분리의 삶을 위한 새로운 용기와 경험을 안겨줬다. 가뜩이나 일에 불만인 가운데 거리두기가 낳은 재택근무는 직장을 재해석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출퇴근 말고는 선택카드가 없을 줄 알았는데 집에서도 된다는 걸 타진했을 뿐더러 통근낭비의 필요가 없다는 걸 깨우쳐줬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끈끈한 사연(社緣)이 성과달성의 필수불가결한 무형자산이란 인식을 깨트렸다. MZ세대는 이를 한층 절감하고 있다. 회사와의 거리두기 경험이 직장에 대한 의미를 재검토하게 만들었다. ‘회사는 미래가 아니다’라는 심정적 감각을 키워주고 있다.
그렇다면 집을 향한 입지적 욕망은 변한다. 직주일체가 아닌 직주분리가 새로운 삶의 트렌드일 수 있는 가능성의 타진이다.
일과 집의 일체·근접화는 ‘상시 통근’이 전제다. 반대로 출퇴근이 자유롭다면 직주동일은 설명력이 옅어진다. 출퇴근 일자리가 줄수록 직장근처의 집이 갖는 유인책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불가피성이 만들어낸 직주분리지만, 역설적이게 미래의 강력한 트렌드로 안착될 가능성이 크다. 비록 아직은 직주일체를 욕망하지만, 갈수록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시계열로 보면 ‘직주일체(전통사회)→직주분리(성장사회)→일체욕구(현재희망)→분리현실(미래추세)’의 흐름을 점쳐본다.
실제 일자리는 시나브로 변한다. 인식도 역할도 시대변화에 맞춰 수정된다. 앞으로 일은 유동화될 확률이 높다. 특정시공간을 다함께 공유하는 집단근로는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19로 재택화를 실험했고, IT·인터넷이 공간성을 추월했다. 출퇴근 없이도 얼마든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긱(Gig) 이코노미’의 출현이다. 긱은 ‘임시직’을 뜻한다. 비대면과 디지털이 키워낸 긱워커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일본 도시개발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도쿄 롯폰기 힐스. [연합·123rf] |
프리랜서코리아에 따르면 2017년 전문프리랜서 120만명, 투잡 240만명으로 광의의 ‘N잡러’(정규직이 아닌 형태로 2개이상 복수의 일을 하는 사람)까지 넣으면 1000만명에 달한다. 시장규모는 75조원을 웃돈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의 통계라 지금은 더 늘었을 수 있다. 공식적인 부업도 47만여명(2019년)으로 통계작성(2003년) 이후 최대치다.
다니엘 핑크가 말한 ‘프리에이전트 시대’는 현실이 됐다. 조직에서 벗어나 시공간을 맘대로 설정해 일하고 돈버는 직업인의 등장이다. 그간 전문영역이었으나, 플랫폼의 다양화로 시장창출은 확대된다. 부캐가 본캐가 되는 경우도 증가세다. 활발해진 고용절감형의 아웃소싱은 비정형적인 프리랜서가 노동의 미래라는 예견에 힘을 싣는다.
맥킨지는 미국 노동인구 중 긱워커가 2025년 18.5%까지 늘 것으로 본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MZ세대에게 비정형적 일은 선호될 수밖에 없다. 2019년 신규 취업인구의 9%가 이런 일자리(프리랜서+1인창업)다. 취업보다 ‘창직’(새로운 직종을 만드는 활동)으로 방향선회란 얘기다. 디지컬에 익숙한 ‘포노 사피언스’에게 중요한 건 어디서 일하느냐보다 무슨 일이냐로 요약된다. 이때 일의 변화는 외부적 고용실종에 맞선 자체적 고용혁명에 가깝다.
일의 변화는 집과 삶을 바꾼다. ‘일→집→삶’의 연결변화다. 삶의 성공잣대였던 직주일체(근접)보다 직주분리형 행복 추구를 위한 거주공간이 부각된다. 최근 새롭게 실험 중인 ‘다거점생활’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제기된 신주거트렌드로 직주분리의 절충형이다. 생활거점을 여러곳에 두고 생활하는 방식이다. 2011년 지진재해 이후 일종의 대피처로 주목받았는데, 지금은 개념·형태가 다양화하고 세분화됐다. 코로나19와 디지털화와 맞물려 단순한 ‘5도2촌(일주일 중 5일 도시 2일 농촌)’을 넘어 노마드형으로 장소에 덜 구애받지 않는 라이프스타일까지 포괄한다. 일본에서 ‘다거점생활 추천’ 등 관련 서적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리틀 도쿄’로 불리는 모리타워가 있는 도쿄 롯본기 힐즈.[게티이미지] |
NHK는 최근 새로운 삶의 형태로 다거점생활을 다룬 방송을 내보냈다. 재택근무가 늘며 다거점생활 플랫폼(ADDress)의 신규이용자가 10개월새 5배 늘어난 사례를 소개했다(2020년). 집은 직장과 가까워야한다는 기존상식을 깼다. 월 4만~5만엔의 비용으로 디지털 유목민을 실현한 이들이 주요 대상이다. 대개 자유롭게 살려는 의지를 행동에 옮긴 독신파 MZ세대다.
다거점생활을 하려면 집의 무소유, 미니멀 라이프 등의 가치관을 받아들여야 한다. 일본에선 이런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수용하는 회사도 등장했다. 한적한 시골에 위성사무실이나 전국망 거점 오피스를 만들어 다거점생활을 거드는 것이다.
다거점생활은 직주분리를 구체화한다. 관련 시장은 성장세다. 주택마저 ‘구독경제화’함으로써 그때그때 원하는 지역·형태를 제안한다. 단독주택부터 쉐어하우스까지 선택지는 넓다. 다거점생활로 새로운 경험과 일거리도 연결된다. 빈집 문제도 일정부분 해결된다. 유휴공간의 경제적 변신이 일어난다. 업무형태와 상황에 따라 집주인, 사용자, 회사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유형이다. 물론 단점도 있다.
전영수 한양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기고 |
고정된 주거공간 없는 다거점생활은 이동용 수단의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가족동반은 특히 힘들다. 공공서비스를 제때 제공받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다거점생활은 길게 볼 때, 새로운 보완 모델로 부각할 가능성이 크다. 힘들어진 직주일치의 욕망에서 벗어나 새로운 일과 달라진 집을 매칭할 수 있다. 직(職)보다 업(業)이 부각되는한 직주분리는 심화될 수밖에 없다. 선호하는 주거유형도 그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주거유형은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다.
부동산360 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