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이를 지켜보는 것이 가장 괴로워”
“1억 넘게 청구된 병원비, 보험 아니었다면 아찔”
이른둥이 강기훈(가명)군의 출생 당시 사진. 6개월만에 조산한 강군의 출생 당시 몸무게는 0.94kg이었다. 정상아(2.5kg~3kg)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자료제공=유정연(가명)] |
※이 글은 이른둥이를 출산한 유정연(32·가명)씨의 인터뷰를 독백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헤럴드경제=박상현 기자] 첫째 기훈(4·가명)이는 예상보다 일찍 태어났다. 병원에선 나에게 조산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기훈이는 임신 6개월이 조금 지났을 무렵 세상에 나왔다. 기훈이를 만난 후 3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머리와 가슴에 선명히 남은 세 가지 순간이 있다. 이른둥이인 우리 아이를 키우며 이따금 떠오를 때마다 목이 메는 그런 기억들이다.
기훈이를 처음 만났을 때, 첫인상은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1㎏이 채 안되는 0.94㎏으로 태어났다. 키도 30㎝를 조금 넘어 내 팔목 정도였다. 몸무게부터 머리둘레까지 모든 것이 작았다. 의사는 기훈이가 하위 3~5% 수준이라며 정밀검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아이를 처음 마주하고 많이 울었다. 기쁨도 있었지만 죄책감이 더 컸다. 나 때문이다. ‘모든 건 내 잘못이고 나 때문에 아이가 일찍 태어났다.’ 곧 죄책감이 엄습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기훈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 의사는 수술을 권했다. 만삭에 태어난 아이들은 저절로 닫히는 동맥관이 기훈이는 닫히지 않았다. 약물치료도 소용없었다. 의사는 아이 등을 손가락 한 마디 정도로 절개해 그 관을 집어야 한다고 했다. 청천벽력이었다. “이른둥이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위험한 수술이 아니다”로 시작한 긴 설명 끝에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다.
그 작은 아이 몸에 칼이 닿았다. 내 살이 조금만 찢어져도 아프고 따가운데 말도 못하는 아이는 얼마나 아플까. 병원에서부터 쏟아진 눈물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에서도, 집에 도착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 때 아이 등에 생긴 흉터는 아직도 남아 아이가 클 수록 함께 커지고 있다. 옷을 갈아입혀줄 때마다 아이는 볼 수 없는 등의 상처를 보면, 내가 더 이상 옷을 갈아 입혀주지 않아도 될 때에도 이 상처가 남아 있을 거란 생각과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병원에 입원 중인 이른둥이 강기훈(가명)군의 당시 사진 [자료제공=유정연(가명)] |
두 번째 순간은 기훈이가 퇴원하고 집에 처음 왔을 때다. 기훈이는 인큐베이터에 100일 정도 있었다. 6개월 조금 넘어 태어났으니 엄마 뱃속에 더 있었어야 했을 시간만큼을 인큐베이터에서 보낸 셈이다. 기훈이는 퇴원을 하고 집에 와서도 산소 호흡기를 달고 살았다. 기훈이는 폐가 안 좋다. 의사는 기훈이의 폐 사진을 보여주며 ‘폐 이성형증’이라고 했다. “이른둥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이어 어려운 의학용어들이 뒤따랐다. 그 순간 내 눈은 가래가 낀 것처럼 하얀 무언가가 뿌옇게 서려있는 아이의 폐 사진에 멈춰 있었다.
손가락에 연결해 심장박동을 체크하는 측정기와 모니터도 함께였다. 매일 모니터를 들여다 봤다. 수시로 아이 코 앞에 손가락을 대보고 모니터를 확인하고 다시 수차례 반복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한동안은 무서워 밤에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산소 호흡기는 언제쯤 떼어도 괜찮을까’ ‘떼고 나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아닐까’란 불안도 늘 함께 했다. 병원에선 ‘대충 어느 시점 쯤 되면 제거하라’는 말 뿐이었다.
숨을 잘 못 쉬는 기훈이는 밥을 먹는 것도 힘겨워했다. 입으로는 밥을 온전히 다 먹지 못했다. 그때마다 코를 통해 인공호스를 삽관하고 주사기로 밥을 넣어야 했다. 3시간마다 코를 통해 주사기로 영양분을 보충했다. 아이의 일그러지고 괴로워하는 표정에도 행여 무슨 일이 생길까 눈을 질끈 감지도 못했다. 기훈이는 요즘도 밥을 잘 먹지 못한다. 고통스러웠던 그 기억에 자기도 모르게 그러는 게 아닌가란 생각은 이내 곧 다시 죄책감으로 번진다.
세 번째는 기훈이가 어린이집에 들어가 동갑 친구들과 한 반이 된 첫 날의 기억이다. 만삭에 태어난 친구들은 모두 기훈이보다 머리 하나는 더 차이가 날 정도로 컸다. 처음 어린이집에 들어갈 땐 자리가 없어 한 살 어린 친구들과 같은 반에서 지냈다. 기훈이가 예정일에 태어났다면 계속 함께 지냈을 아이들이었다. 그 때는 기훈이와 다른 아이들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차이를 실감한 그 순간 또 다른 불안이 생겼다. ‘아이가 친구들보다 왜소해 치이진 않을까’ ‘아이가 힘들어하면 어떡하지’란 생각이 덮쳤다.
아이가 새로운 사회, 새로운 공동체로 편입될 그 순간이 늘 걱정된다. 아이가 잘 먹지도 않는데 성장이 더디거나 학업도 잘 못 따라가면 어쩌지. 요즘 학교는 따돌림이나 괴롭힘 문제도 많다는데. 앞으로 훨씬 더 큰, 더 많은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아이가 괴로워하진 않을까. 아이가 집으로 돌아와 웃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재잘대는 순간에도 불현듯 이러한 생각들이 밀려오곤 한다.
퇴원을 하며 병원에서 청구된 금액은 1억원을 넘었다. 미리 들어 놓은 보험이 아니었다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다행히도 지금 기훈이는 아주 건강하다. 뛰어다니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놀이터에 나가 노는 것도 좋아한다. 아이가 건강하게 크고 있어 나의 감정들도 추스릴 수 있게 됐다. 나를 죄책감과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 속에서 구원해준 것은, 지금도 유튜브를 보여 달라며 다른 아이들처럼 떼를 쓰고 있는 우리 기훈이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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