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Microgen/셔터스톡] |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1980년대만 해도 한국의 과학수사는 지문과 혈액형 감식이 전부였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진보와 첨단 장비의 도입 등과 함께 최근의 과학수사 기법은 비약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최근에는 DNA로 범죄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 것을 넘어, 이를 통해 범인의 행동 수준까지 유추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근미래에는 첨단 기술을 탑재한 로봇·인공지능(AI) 시스템이 과학수사 업무에 활용될 것으로도 기대된다.
1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따르면, 최근 과학수사 연구로 범죄 현장에 남겨진 DNA로 범죄자의 정보 뿐만 아니라 범죄 현장에서 벌어진 범인의 행동까지 추측하는 ‘DNA 메틸화’ 기법이 주목받고 있다.
DNA에는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하는 대사 물질인 ‘꼬리표(메틸기)’가 있다. 이 꼬리표의 구조를 정밀하게 분석하면 범인의 나이와 성별, 질병, 눈색, 피부색뿐만 아니라 흡연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
이 기법을 활용하면 DNA가 정액이나 침, 땀, 혈액, 질 분비물, 살점 등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보다 정밀한 범인의 범죄 행동도 추측할 수 있다. 범인이 성폭행을 했는지,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 등 분석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국과수 관계자는 “유전자가 메틸화하는 특성을 이용해 수사의 범위를 축소할 수 있다”며 “다만 연구 초기 단계로 기술 정확도를 검증하는 단계”라고 설명했다.
동위원소를 분석하는 고도화된 프로파일링 기법도 등장했다. 공산품, 약독물, 농축산물, 폭발물 등 모든 화학물질의 소위 ‘화학적 DNA’를 감정해 범인을 알아내는 기법이다. 원재료가 생산된 지역이나 합성 과정 등에 따라 탄소·질소·산소·수소·황 등의 원소 함유 비율이 서로 다른데 이 조합의 가짓수는 DNA 만큼이나 많다. 화학 성분의 특수한 차이를 감정해 범인 추적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유전자과 실험실 [국과수 제공] |
대표적인 예가 지난 2016년 3월 청송군 현동면 한 마을회관에서 주민 2명이 소주를 나눠 마셔 1명이 숨지고 1명이 중태에 빠졌던 일명 ‘청송 농약소주’ 사건이다. 이들이 마시다 남긴 소주에서 메소밀 농약 성분이 검출됐다. 그런데 용의자 5명의 집에는 모두 메소밀 농약이 있었고 경찰은 범인을 특정할 수가 없었다. DNA·지문 검사도 이뤄졌지만 이렇다 할 단서는 없었다.
국과수는 용의자들의 집에서 압수된 농약의 동위원소를 분석했다. 그런데 이는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소주 속의 농약 성분 조합과 전부 달랐다. 오히려 용의 선상에서 배제됐던, 사건 이후 자살한 주민의 음료수 병에서 탄소·질소·수소 동위원소 값이 범죄 현장의 소주 속 메소밀 농약의 값이 정확했다. 경찰은 이 자살자를 범인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동위원소를 분석해 백골화된 시신의 출생연도와 사망연도를 파악하는 연구가 한창이다. 국과수에 의뢰가 들어오는 부검 건 가운데 연간 100여건이 백골화된 시신 부검이다. 몸이 썩고 뼈만 남은 시신만으로 사망연도를 파악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에 국과수는 지난 2014년부터 한국지질자원연구소와 탄소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사망연도를 추측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백골화된 시신에서 치아와 대퇴골을 채취해 콜라젠을 추출하고 이로부터 탄소만을 모아 흑연을 만든 뒤 특수한 질량분석기를 통해 해당 흑연의 탄소농도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이밖에도 AI 기술이 접목된 3D 몽타주 기법, 폐쇄회로(CCTV)에 찍힌 용의자 얼굴이나 걸음걸이를 분석해 신원을 확인하는 기법 등 최첨단 기술을 탑재한 수사기법 연구개발(R&D)이 국내에서 진행 중이다. 국과수 관계자는 “미래의 과학수사 모습을 섣불리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범인이 남긴 냄새를 채취해 증거로 활용하거나 범인의 목소리로 신원을 확인하는 기법 등이 과학수사 업무에 활용될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d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