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는 떡방앗간을 운영하십니다’라는 작품을 낸 경북외국어고 이혜원(17ㆍ사진)양이 직업사랑 글짓기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27일 한국산업인력공단(이사장 송영중)은 ‘제6회 직업사랑 글짓기대회’에 초등, 중등, 고등, 대학일반 등 4개 부문에 응모한 1305편의 작품 중, 세 차례의 심사를 거쳐 대상 1편, 최우수상 4편, 우수상 8편, 장려상 36편, 참가상 15편을 최종 확정했다고 밝혔다.
대상을 받은 ‘우리 아빠는 떡방앗간을 운영하십니다’라는 작품은 IMF위기 이후 실직해 떡 방앗간을 운영하게 된 아버지를 통해 건전한 직업관을 형성해가고 아빠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표현해 작품 완성도가 높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각 부문별 최우수상은 초등부 ‘요술을 부리는 손’(서산초등학교 조원진), 중등부 ‘아빠의 입과 귀가 되어드리겠습니다‘(부평서여자중학교 김명미), 고등부 ’아빠의 새 삶을 응원합니다‘(광주국제고등학교 이유효), 대학일반부 ’나는 도시농업인‘(수영강녹색생활학교 박옥현) 등이 선정됐다.
입상자에게는 상장과 함께 상금 100만원(대상), 상금 50만원 또는 디지털카메라(최우수상), 상금 30만원 또는 PMP(우수상) 등이 부상으로 지급된다.
아래는 대상을 수상한 ‘우리 아빠는 떡방앗간을 운영하십니다’라는 제목의 작품이다.
<우리 아빠는 새까맣다. 따가운 볕 아래 쪼그려 앉아 볶은 콩을 휘휘 젓는 아빠의 굵은 팔목도, 투박한 손도, 땀 맺힌 얼굴도 새까맣다. 아빠에게서는 언제나 땀 냄새가 난다. 여름에도 두터운 가죽 장화에, 손에는 흰 장갑에 빨간 고무장갑을 덧쓰고, 뜨거운 증기 앞에 서성거리는, 아빠에게선 언제나 땀 냄새가 난다. 그러나 아빠의 손은 고소하다. 작은 송편을 조물딱 조물딱 예쁘게 모양내어 참기름을 덧바르는, 아빠의 손은 고소하다. 우리 아빠는 동네에서 작은 떡 방앗간을 운영하신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추석이나 설 같은 명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가 쥐어주시는 빳빳한 새 돈도, 오랜만에 만나는 한 살 차이 사촌 언니도, 기름지고 맛있는 명절 음식도 내겐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명절이면 꼬박 일주일간 부모님의 떡집 일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명절을 전후로 온 마을이 한가로울 때, 유독 우리 집만 정신없이 바쁘다. 명절이 다가오면 엄마는 가장 먼저 큰 냄비에 육개장을 끓이신다. 앞으로 한 사흘 동안은 아침 점심 저녁을 그 육개장과 함께 해야 한다. 엄마가 아빠의 일손을 도와 바쁘셔서, 따로 상을 차릴 시간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설거지와 빨래 같은 자잘한 집안일도 당연히 나와 내 동생 몫이다. 그것뿐이랴. 명절을 앞두고 나와 내 동생은 마을 곳곳에 우리 떡집을 홍보하는 전단지를 붙이는 심부름을 맡는다. 입을 다발이나 내민 채로 나와 내 동생은 전단지를 붙인다. 설에는 양 볼이 꽁꽁 얼 만큼 춥고, 추석에도 설 못지않게 쌀쌀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바로, 아는 얼굴을 마주치는 일이다. 제 키보다 높은 전봇대 위에 전단지를 낑낑거리며 붙이고 있는 데, 맞은편에서 같은 반 좋아하는 남자애가 다가오면 전단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에 돌아가 내 방에 꼭꼭 숨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너네 아버지 떡집하시니?”
내 앞에 선 그 애가 이렇게 말을 걸어왔을 때, 마침내 나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아빠가―아니, 아빠의 직업이 부끄럽다.
나는 버스를 타고 시내에 있는 중학교까지 통학했었다. 가끔씩 아빠는 나를 생각해서 아침 일찍 반 아이들과 나눠먹을 수 있는 30인분의 떡을 만드셨는데, 나는 그런 아빠의 배려가 너무 너무 싫었다. 아침에 바쁘신 아빠를 대신해 내가 학교까지 그 떡 상자를 들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붐비는 아침 통학 버스에 우리 방앗간 상표가 적힌 떡 박스를 들고 있으면, 힐끗 힐끗 훔쳐보는 시선들이 모두, 나를 보잘 것 없는 떡집 딸이라며 흉보는 것만 같았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건만 괜한 자격지심에 혼자 큰소리로 떠들기도 했다.
“아, 이거? 이거 그냥 동네 떡집에서 산거야. 괜찮다니깐 엄마가 자꾸 챙겨주셔서…….”
새 학기에 들어서서 처음 신상정보를 작성할 때, 부모님 직업란에서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짜증 섞인 필체로 삐뚤빼뚤 써넣는 글씨.
‘떡 방앗간 운영’
가끔씩 탈탈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떡 배달을 하시는 아빠와 마주칠 때면 나도 모르게 아빠를 외면해 버리고 만다. 아빠가 변호사나 선생님같이 멋들어지고 돈 잘 버는 직업을 가지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나도 부모님 직업란에 예쁘고 자랑스럽게 아빠의 직업을 적을 수 있을 텐데.
사실 아빠도 처음부터 떡집을 하셨던 것은 아니다. IMF 이전에는 번듯한 회사에서 그릇 디자인을 전공하셨다. 그런데 회사가 부도가 나서 실직하시게 되자, 떡집이라는 자영업을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벌써 십년이 넘도록 떡을 만들어 오셨다.
아빠가 하시는 떡집일은 고된 노동이다. 겨울에도 땀이 뻘뻘 나는 증기 앞에 몇 시간이고 서있어야 하고, 무거운 쌀 포대도 끊임없이 날라야 한다. 하루 종일 낀 고무장갑 냄새가 손가락 사이사이에 배이고, 쌀뜨물에 손가락 끝 피부가 메마른 땅처럼 갈라지기도 한다.
‘아빠는 정말 이 일이 하고 싶으실까. 경기도 좋아졌는데 다시 다른 일을 찾아보면 안 될까.’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일찍 잠자리에 드신 아빠의 등을 보고 한숨 쉬며 생각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동네 대표로 떡 명장대회에 출전할 기회를 얻으셨다. 그 날 저녁부터 아빠는 다른 동네 떡도 직접 사서 먹어보고, 예쁜 떡 디자인을 공책에 그려도 보고, 일이 없을 때는 시험 삼아 떡도 만들어 보면서 틈틈이 대회를 준비하셨다. 상금이 많은 것도 아니요, 수상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저리 열심히 하실 필요가 있나 하고 내심 생각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아빠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떡 케이크들에 밀려 입상하지 못하셨다.
그러나 아빠는 실망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많을 걸 배워왔다고 기뻐하시기까지 했다. ‘앞으로 더 맛있고 예쁜 떡을 만들어서 우리 딸들 대학도 보내야지’ 하셨다. 그 뒤로도 아빠는 꾸준히 떡에 대한 신문기사를 스크랩하고, 새로 개발한 떡을 시식해보기도 하고, 공책 가득 떡 디자인을 그리셨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아빠가 일 하시다 말고 내게 한달음에 달려오셨다.
“혜원아, 이 아빠가 네게 자랑할 것이 생겼단다.”
얼굴에 함박웃음을 담으시고 가겟방에 들어가시더니 네모난 액자와 작은 카드를 들고 나오셨다. 그것들은 바로 제병관리사 2급 자격증과 그 증명서였다.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새벽같이 가게로 나와서 일 하시면서 어느 틈에 이렇게 자격증 공부까지 하셨나 싶었다. 그리고 그 자격증서 안에 환히 웃고 있는 아빠 얼굴을 보자, 나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언제……, 언제 이런 걸 다…….”
오늘 낮에 도착한 소포인데, 가장 먼저 내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아빠가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제야 나는 떡을 만드시는 아빠를 똑바로 보게 되었다. 비록 떡집 일을 시작한 것이 본인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아빠는 언제나 당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최선을 다하고 계셨던 것이다. 오십에 접어든 나이에서도 아빠는 떡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시며 오늘의 열매를 일구어 내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빠의 모습에서 나는 깨달았다.
천한 직업은 없다, 부끄러운 직업도 없다. 자신이 갖고 있는 자부심만으로도 그 직업은 그 누구도 얻지 못하는 아주 귀한 직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바로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의 아빠는 몸소 딸에게 보여주셨다.
나는 처음으로 아빠의 직업이 자랑스러워졌다. 아빠가 자랑스러워졌다.>
<박도제 기자 @bullmoth>pdj24@heraldcorp.com